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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29 About Steven Paul Jobs / 스티븐 잡스에 대해서 4


스티븐 (Steven Paul Jobs) 1955 2 24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의 아버지 압둘파타 잔달리 사이에서 어났습니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인과 함께 동업으로 플 컴퓨터를 설립, 브루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애플1 개했으며, 애플 2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시켰습니다.

, GUI마우스의 가능성처음으로 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는데 1985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업하여 로운 개념의 운영체제를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애플이 넥스트스탑을 인수하면서 경영 컨설턴트로 복귀했다. 애플 CEO로 활동하며 아이폰, 아이패드를 출시, IT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생부모는 "정자·난자 은행일 뿐"

잡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입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에 대해 잡스는 다소 흥분되고 짜증스런 어투로 생부모 보다는 양부모가 '진짜 부모'라고 강조했다.
그는 생부모에 대해 "나의 정자와 난자 은행일 뿐"이라며 "그동안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잡스는 생모인 조앤 심프슨에게 직접 전화해 "낙태할 수도 있었는데 출산을 해서 고맙게 여겨졌다"고 전하기도 했다.또 "입양아라서 부모님이 나를 되찾게 하려고 열심히 일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도 나오는데 사실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돼 오히려 독립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자마자 양부모 폴과 클라라에게 입양되었다. 양부모는 엄격한 기독교신앙을 가진 미국서부의 농부였다. 그의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인이 되었으며 캘리포니아 주 해안경비대에 들어가 경비정 기관사로 근무했었다. 전역 후 클라라와 결혼하였고 자동차정비, 할부금 수금원 등의 직업을 가졌고 아이가 없자 스티브 잡스를 입양하였다. 잡스는 성인이 되어서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고 작가로 활동하는 모나 심프슨이라는 여동생과 대화 치료사였던 어머니와 정치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존재도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양부모를 친부모로 여겼다.

 

3살 되던 해 아버지의 직장(자동차영업, 부동산중개)을 따라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의 산업단지에 들어선 주택가로 이주하였고 주변 전자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성장하였다. 이때 전자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동년배 빌 페르난데스, 5살이 많았던 스티븐 워즈니악(Steve Wozniak)을 만나 교류했으며 스티브 잡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학교에서는 낙제생이자 독선적인 외톨이였지만 전자적인 지식과 집념 그리고 유쾌한 성격은 비슷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미국 히피문화에 흠뻑 젖어있었다고 회고한다. 홈스테드고등학교를 마친 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마약을 중단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년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아타리(Atari)라는 전자게임회사에 취업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스티브 잡스는 히피차림으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수개월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였지만 그가 기대했던 내면의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지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가 아타리사에 복직하였다. 그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으며 이때 다시 워즈니악과 친분을 쌓았고 전자분야의 지식이 해박했던 그의 도움을 받았다. 사업적인 수완과 마케팅 감각이 뛰어난 스티브 잡스는 천부적인 전자 엔지니어였던 워즈니악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했고 각각의 장점을 합쳐 두사람은 1976년 컴퓨터(회로기판)를 제조하는 회사를 공동창업을 하였다. 당시 회사이름은 스티브 잡스가 오리건 주의 선불교 수행을 하던 장소였던 사과농장을 연상하여 애플(Apple)이라고 지었다.

 

회로기판만 있는 퍼스널컴퓨터 '애플Ⅰ'을 만들어 발표했으며, 당시 퍼스널컴퓨터 시장이 주목받게 되자 곧 새로운 컴퓨터 플랫폼인 애플Ⅱ를 만들어 냈다. 확장슬롯으로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획기적인 운영체계를 적용하여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영세한 업체로서는 사업여건이 불리했다. 스티브는 이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을 열정적으로 설득해나갔다. 마침내 그들의 퍼스널컴퓨터는 시장에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미국에서 최고 부자대열에 합류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동안 연인관계였던 크리스 앤과 사이에서 리사(Lisa)라는 딸을 두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친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친자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이후 리사가 친자임을 받아들였다. 또한 모순된 성격과 인색함으로 어려운 시기에 힘이 되었던 친구들에게서 외면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회사내에서는 매킨토시와 리사 컴퓨터를 개발하면서 애플사의 핵심 엔지니어와 경영진 사이에 반목이 심해졌고,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불화를 조화롭게 리드하지 못했다. 자신이 주도했던 리사 프로젝트에서 밀려나자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를 믿고 따랐던 매킨토시 프로젝트 담당 엔지니어들은 노력에 비해 형편없는 연봉을 받는다는 불만이 고조되었고 스티브 잡스에 대한 배신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매킨토시 컴퓨터를 선보이고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실패한 리사 프로젝트팀과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메킨토시 발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맥(Ma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트웨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판매는 급속하게 줄었다. 스티브 잡스의 독특한 스타일과 분위기와 함께 매킨토시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이제 불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1월 19일 워즈니악과 함께 백악관에 초빙되어 레이건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가기술훈장을 받았지만 워즈니악은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스티브는 현실성없는 망상가이자 회사를 도탄에 빠뜨린 인사로 지목되어 1985년 5월 경영일선에서 쫓겨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NeXT)社를 세워 세계최초의 객체지향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NeXTStep)을 개발하였고 1986년에는 조지 루카스 감독으로부터 픽사(Pixar)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하였다. 차세대 운영체제를 갖춘 그래픽 전용 컴퓨터를 개발하여 의료업계에 판매하려고 시도했으나 두 회사 모두 수익을 못 내고 스티브 잡스를 위기로 몰았다. 그러나 픽사는 하드웨어 사업을 포기하고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면서 회생의 기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1991년 3월 18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로렌 파월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며 2명의 아이를 낳았다. 결혼과 자녀양육 문제를 두고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지만 예전 모습과는 확연하게 변해있었다. 가정은 행복했지만 그의 사업은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미국의 거부 로스 페로와 일본 캐논(Canon)사를 통해 투자를 받으며 겨우 버텨나가고 있었고 회생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픽사의 존 레스터가 감독한 '토이스토리(Toy story)'의 원형이 되는 '틴토이(Tin Toy)'를 만들어 아카데미상 단편 애니메이션상을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을 받았지만 회사매출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잡스는 픽사를 인수한 것에 후회하고 있었다. 1996년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운영체계를 원했던 애플이 넥스트 사(社)를 인수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13년만에 다시 애플로 복귀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역할하며 4억달러 흑자를 내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픽사는 존 래스터가 제작한 제작한 토이스토리의 대대적인 성공에 맞추어 상장하여 거의 빈털털이에 내몰렸던 스티브 잡스를 단번에 억만장자에 올려놓았다. 2006년에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잡스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임원이 되었다.

 
 

혁신의 시작은 '디자인'

잡스는 어린 시절 입양아였기 때문에 남다른 시련을 겪을 수도 있었지만 우연히 컴퓨터와 인연을 맺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잡스의 혁신은 게임업체인 아타리에서 배운 디자인 철학에서부터 시작된다. 전기는 "잡스는 재미난 설계와 매력적인 상호작용을 창출하는 칩들을 추가함으로써 몇몇 게임이 개선되도록 도왔다. 아타리 게임들의 단순함이 지니는 가치를 직관적으로 알아보았다"고 그의 디자인 철학을 소개했다.

잡스는 "멋진 디자인과 심플한 기능을 저렴한 가격과 결합하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그것이 바로 애플 컴퓨터가 애초부터 가졌던 비전이었다. 첫 번째 맥 컴퓨터로 시도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고, 아이팟으로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로 복귀한 2년 동안 애플은 자본이 2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픽사는 연이은 흥행성공으로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화사로 기록되고 있었다. 한층 여유로워진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과 접목한 새로운 제품개발에 눈을 돌렸으며 그 대상은 음악이었다. 그는 항상 제품의 모양과 색깔을 결정하는 디자인에 매우 중시했다. 아이튠즈 개발에 이어 아이포드라는 MP3플레이어를 개발하여 세계적인 히트상품 반열에 올려놓았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완벽주의자'

잡스의 팬들은 그가 왜 청바지와 티를 고집했는지 궁금해한다. 전기에서는 그의 꼼꼼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성격 때문으로 묘사하고 있다.
애플 CEO로서 신제품 발표 때마다 보여준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에 인상을 받은 사람들도 많지만 이것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그의 철저한 준비 덕분이다.잡스의 아내 로렐 파월은 "잡스는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직접 내용을 만들고 수정하고 보통 6~7번씩 바꾸는 경우가 많다. 프리젠테이션 전날 밤 늦게까지 점검하고 3가지의 버전을 보여주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그의 완벽주의는 목수인 양아버지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양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잡스에게 "보이지 않은 쪽이라도 저급한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잡스는 "잘못된 제품을 출시하느니 일정을 어기는 게 낫다"고 말 할 정도로 기술, 경영 등에서 완벽을 추구한 인물이다.

 

그는 이제 사업가에서 세상을 바꾸는 인물로 인지되고 있었다. 많은 청중들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로 연설하는 모습은 바뀌어가는 세상의 서막을 알리는 행사로 각인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만든 제품에 열광했다. 2007년 맥월드에서 아이폰이 발표되고 전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애플은 약 500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특히 아이폰은 통신업계 전반을 뒤흔들어 놓았고 문화적 파급효과도 지대했다. 또한 2010년 발표된 아이패드라는 태블릿 컴퓨터를 발표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주도하는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죽음 아쉽지만 '의식은 영속'

잡스는 전기에서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마감되는 것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는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그 모든 게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그래서 뭔가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뜻대로 그의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다. 그가 남긴 '혁신'은 지금 많이 기업들의 귀감이 되고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전 세계 많은 이용자들이 그를 생각하고 기억하게 하고있다. 

 

IT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며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개인적으로는 희귀암 발병 등 건강문제에 시달렸다. 2004년 췌장암으로 수술을 받고 2009년 간이식 치료를 받았다. 2011년 8월 24일 병세악화로 애플 CEO직을 사임했고, 사임 후 2달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5일에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스티븐 폴 잡스(Steven Paul Jobs) 연혁

 

1955년 = 스티븐 폴 잡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2월24일 출생
1972년 = 잡스, 오리건주 포틀랜드 리드컬리지 입학, 한 학기만에 자퇴
1974년 = 잡스, 비디오게임 제작사 아타리에서 근무하던 중 ‘홈브루 컴퓨터 클럽’ 모임에서 

                고교동창 스티브 워즈니악과 만남 
1976년 = 잡스·워즈니악, 4월 애플컴퓨터 설립, ‘애플1’ 출시
1978년 = 잡스와 여자친구 브레넌 사이에 딸 리사 태어남
1980년 = 애플, 공개상장
1982년 = 애플, 연매출 10억달러 돌파
1983년 = 잡스, 존 스컬리 CEO로 영입
1984년 = 1월 매킨토시 출시, 이해 슈퍼볼에서 광고 ‘1984’ 발표
1985년 = 잡스, 스컬리와 충돌로 9월 애플에서 방출. 스티브 워즈니악도 퇴사
1986년 = 잡스, NeXT 설립. 조지루카스로부터 ‘픽사’ 1000만달러에 인수 
1997년 7월 = 9일 잡스, 애플 CEO직무대행으로 복귀
1998년 5월 = 애플 아이맥 출시
2000년 1월 = 6일 잡스, 맥월드엑스포에서 CEO로 공식 취임했음을 발표
2001년 10월 = 애플, 휴대형 음악재생기 아이팟 출시
2003년 10월 = 잡스 췌장암 판정
2004년 8월 = 1일 처음으로 수술 사실 공개
2005년 6월 = 12일 스탠퍼드대학 강연에서 암 투병 사실 언급
2007년 1월 = 애플, 스마트폰 아이폰 출시
2008년 6월 = 9일 애플 개발자회의에서 유달리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 21일 애플, 잡스 사임

                     계획없으며 건강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라는 공식입장 밝혀. 애플 주가는 10% 하락
2008년 9월 = 9일 잡스, 신형 아이팟 직접 공개, 중병설 일축
2009년 1월 = 5일 잡스, 공개서한 통해 “호르몬 불균형 있으며 체중 감소하고 있다”고 밝힘.

                     14일 잡스 병가. 회사 경영을 팀 쿡 COO에게 넘긴다고 밝히고 중요한 전략적

                     결정에는 여전히 참여할 것이라고 밝혀.
2009년 6월 = 23일, 잡스 간 이식수술 성공적이라고 밝혀. 29일 잡스가 업무에 복귀한다고 발표
2009년 9월 = 9일, 잡스 업무 복귀 후 처음으로 공개석상 등장해 아이팟 신제품 소개
2010년 1월 = 애플, 태블릿 아이패드 출시
2010년 5월 = 애플 시가총액, 마이크로소프트를 추월
2011년 2월 = 23일, 잡스 팀 쿡에게 다시 운영 넘기고 병가 
2011년 3월 = 23일, 아이패드2 발표 위해 병가 후 다시 공개석상 등장
2011년 6월 = 아이클라우드 발표
2011년 8월 = 24일, 잡스 애플 CEO 사임, 팀 쿡 후임으로 지명

2011년 10월 = 10월5일 56세를 일기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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